티스토리 뷰

 

HWPL 이만희 대표님 소개

HWPL 이만희 대표님은 1931년생으로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현리동 가난한 시골 농가에서, 3대 독자이신 아버지로부터 빛으로 태어납니다.

할아버지께서 태몽 중에 큰 빛을 보고 이름을 ‘빛’으로 지어 두셨고 태어난 후 이름을 ‘빛(熙)’으로 부르셨고 그 이름이 지금의 HWPL 이만희 대표님의 이름입니다.

 

 

 

 

 

 

 

6.25 전쟁 당시 19세 나이에 학도의용군으로 참전 최전방 보병부대 (7사단) 하사로 제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참전 지역을 살리기 위한 새마을 운동 등 격변의 한국 근대사의 산증인이십니다.

 

 

총회장님 말씀

 

동족상쟁 비극의 6.25 남북전쟁

 

 

 

 

 

 

 

6.25 전쟁 당시 나는 서울 성동구 금호동에서 살았고, 용산역 앞 성화전문학원에서 공부 중이었다.

그전에는 내 고향 경북 청도군 풍각면 소재 초등학교에 다녔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이때는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 있을 때였다.

초등학교도 일본 학교였고, 입학은 12살 때 했다.

입학생 중에는 출생 신고를 늦게 함으로 실제 나이가 15세 이상 된 자들도 많았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해서 이때의 학생들은 청년 학생들이 많았다.

또 당시는 일본은 동양에서, 독일은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벌이던 때였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미국에 항복을 하고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게 되었다.

이후 우리나라의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통치를 하였다.

미군의 군정 때였던 당시 우리나라는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매우 혼란하였다.

정부도 들어서지 않았고, 모든 공무(公務)는 다 멈춰 있었고, 학교는 폐쇄되어 정식 교사도 교과서도 없었다.

대신 면 서기, 일본 군대에 갔다 온 자들이 스스로 와서 교사로서 학교를 주관하였다.

해서 우리 6학년생들은 학교 뒷산에 올라가 이 가짜 선생들의 퇴진을 외치는 시위를 했다. 이때는 얼마나 혼돈하고 공허한지, 천지가 무법천지였다.

 

 

 

 

 

 

이후 나는 서울로 가서 금호동에 살았고 성화전문학원에 다녔다.

하나 6·25 전쟁의 발발로 서울을 떠나 발 없는 짐차(기차)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5일 만에 남쪽 고향에 도착하였다.

그러다 입대 영장을 받아 최전방 보병 7사단 전투병으로 입대하였고, 6·25 전쟁에 참전을 하였다.

이 전쟁은 우리나라에서 주관한 것이 아니요, 미군이 주관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사회와 정치, 어느 하나 온전한 것이 없었다. 정부도 없었고, 전쟁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족상쟁의 비극인 6·25 전쟁이 일어난 지 이틀 만에 중앙시장에 적탄 한 발이 떨어졌고, 청량리 쪽에서 용산 육군본부 쪽으로 장거리포 소리가 대풍 소리같이 들렸다.

이때 나는 금호동 한강 쪽 큰 팔각정에서 전쟁의 모습을 보았다.

후퇴하는 국군. 뒤에는 약 100m 거리를 두고 인민군복을 입은 자들이 손에는 따발총을 가지고 뒤따랐다.

인민군은 한국군에게 총을 쏘지 않다가, 한국군이 한강을 건너 백사장을 지날 때 사격을 하였다.

국군은 모래를 파고 들어갔다.

다음날 한강을 건너가 보니, 그곳에서 전원이 전사해 있었다.

 

서울시가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다음 날, 서울시 상공에는 B24 대형(프로펠러 4개) 비행기 수십 대가 떴다.

전쟁 소리, 비행기 소리, 총소리, 대포 소리, 폭탄 소리에 하늘도 울렁, 땅도 울렁, 가슴도 울렁. ‘단벌 신사의 피 묻은 군복, 언제 갈아입나?’?’ 전쟁이 끝나면 그때 신발도, 양말도, 군복도 갈아입을 것이다.

진격하는 청년 군인을 위해 누가 밥 지고 따라오나? 후퇴하는 군인을 누가 밥 가지고 맞이하나? 전쟁으로 죽는 자들의 수보다 굶어 죽은 자들의 수가 더 많았다.

 

준비 없는 전쟁 속에서 죽음으로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킨 용사들. 밥, 밥…, 얼마나 굶어 죽었을까? 이 전쟁의 현실을 아는 자들이 누구일까? 그때의 최전방 전투병들이다.

이들은 죽음으로 나라를 지켰다.

전쟁도 모르는 지금의 권세자들, 감사는 못 할망정 압박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진정으로 고마움을 아는 자가 있는가? 동족들을 죄인으로 만들고 월급 받는 자들은 양심이라도 있는가?

 

어떻게 이 나라를 지켰는가? 죽은 영혼들에게 물어보라.. 총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참혹한 전쟁터의 아우성, 쏟아지는 적탄의 불바다 속에서 거듭거듭 전쟁터로. “오늘은 700 고지, 내일은 저승길….” 이것이 최전방 전투병들의 노래였다.

세월이 가도 그날의 전우들, 목숨 바친 그들이 보여 준 것보다 더한 충성은 없을 것이다.

전우야, 잘 가거라. 우리는 이 땅 조국의 별들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과정에서 본 수많은 전우들의 참담한 죽음은 세계 평화운동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1월 24일을 ‘HWPL 평화의 날’로 선포

 

(사)하늘문화세계광복(HWPL 대표 이만희)님 세계 평화를 이루기 위한 노정(路程) 지구

31바퀴 전 세계의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34개국 214개 교육기관 MOU체결,

2014년 1월 24일 ‘필리핀 민간평화협정’까지 그 이후 현지에 전파되고 있는 HWPl 평화문화

현지인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으며 필리핀 민다나오섬과 각지로 확산되고 있으며

전쟁을 당연시 생각했던 어린아이들에게 평화교육을 제공하며 평화의 문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2018년 1월 23일 필리핀 폴리테크닉대학교 HWPL 이만희 대표님 로날드 아다맛 필리핀 고등교육위원회 CHED 위원 합의각서에 서명 기념촬영 제공 HWPL

 

필리핀에 첫 번째 HWPL 평화 기념비가 건립되고 마긴다나오주는 민다나오 평화협정을 기념하여 월 24일을 ‘HWPL 평화의 날’로 선포하였습니다.

 

 

 

필리핀 민다나오 유튜브 다시보기

 

 

HWPL은 고등교육부 지역 당국자들의 실무 단체로 초대되어 필리핀의 모든 대학에서

평화교육을 실행 필리핀은 17개 지역으로 이뤄져 있고 12개 지역 내 총 65개의 대학과

HWPL 평화교육 MOU를 체결했고 필리핀은 1월 24일을 ‘평화의 날’ 국경일로 지정하였습니다.

 

 

평화의 사자 HWPL 이만희 대표님

 

 

 

우리는 하나입니다! 위 아 원 (We Are One) ~!